자유로운 영혼을 꿈꾼다면

자유는 마치 DNA처럼, 독립성과 책임질 수 있는 능력의 두 줄기로 엮인 이중 나선처럼 보입니다. 이 둘은 묘한 긴장 상태에 놓여있습니다.

자유로운 영혼을 꿈꾼다면
towards a free spirit: Embrace the path of self-discovery and find the courage to pursue your dreams.

새로운 사람에게 자신을 소개하는 순간은 늘 흥미롭습니다. 특히 이따금씩 다른 사람이 대신하여 저를 소개하는 경우가 그런데요. 제가 어떤 단면으로 설명될지 호기심이 생기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제 소개를 청자의 관점으로 접하다 보면 꼭 즐겁기만 하지는 않고 종종 마음이 동요하거나 흠칫 놀라는 일이 생기기도 합니다. 예를 들면 서울대 무슨과를 나왔다거나 출중한 개발자라거나 하는 수식어가 중점이 되는 경우가 그렇습니다. 경계심이 생기기도 하고 그 수식어가 품은 프레임을 깨고 싶어 조급해지기도 합니다.

왜일까요? 아마도 그런 표현이 저를 과시하거나 돋보이게 하기보다는, 저를 구속하고 속박한다고 느끼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특질은 제 껍데기를 장식하는 요소 중 하나에 불과한데, 이것으로 제가 정의되는 순간에 저는 정당하게 평가받지 못하고 있다고 생각이 듭니다. 어찌 보면 제 신발 사이즈가 265mm에서 270mm를 왔다갔다 한다거나(꽉끈은 물론 275mm를 선호합니다), 제 혈액형이 O형이어서 남에게 수혈을 해주기 좋다는 특성들이 그 대체재가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 면에서 MBTI는 조금 더 정당한 요소일까요? :)

제가 학교나 직업에 국한된 정의를 기꺼워하지 못하는 이유는 두 가지가 있는데요. 여기에 대해 이야기하다 보면, 제가 가장 중시하는 가치이자 내적 동기인 “자유”에 대해서도 재밌는 생각거리들을 던질 수 있지 않을까 내심 기대해봅니다.


첫째 이유 — 영원하지 않고 우연한

하나는 그러한 특성이 너무나 가변적이고 우연적이어서 그로만 저를 정의하는 일이 제 정체성까지 위태롭게 만들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학교, 직업,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직함, 부와 명예는 언제나 그 자리에 있지 않고, 필연적으로 어떤 사람에게 귀속되지도 않는다 생각합니다. 만약 저에게 그런 속성이 붙는다면, 다만 그런 수사가 기능을 하는 특정한 시공간대에 우연히 머물렀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스스로를 그러한 외부의 불안정한 대상에 기대어 정의한다면 제 정체성은 끊임없이 위협받게 됩니다.

영원한 속성이 있을까요? 학벌은 언제든 가치를 잃을 수 있고 직업은 언제든 사양될 수 있습니다. N인 제 머리속엔 학벌이나 직함이 일시에 의미를 잃는 시나리오들이 그려집니다. 또한 이러한 특성은 필연적이기보다는 우연적일지 모릅니다-운칠기삼입니다.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하더라도, 우리가 본능적으로 필연성에 기초해 사고하는 편향을 가지고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이러한 사고를 경계하기 위해 우리는 우연성을 눈에 띄게 강조할 필요가 있습니다. 필연성 편향은 실제로 자유에 대한 의지도 위협하기 때문입니다. 왜 그럴까요?

여담. 저는 여러 레드 시그널을 접하면서 개발자라는 현재의 업을 버리고 또다른 재밌는 일을 찾아 떠나고자 결심하고 여러 시도를 하고 있습니다. 여러분도 개발자라는 직업이 현재의 지위를 유지하지 못할거라 생각하시나요?
수많은 대학의 비전공자 학생들이 컴퓨터공학 혹은 인공지능이라는 키워드로 몰려오는 현실에 무서움을 느낍니다. 한편으론, gpt를 따라 AI driven development를 실천하거나, 최근 유행하는 cursor 등의 AI 중심 개발 도구(IDE)를 사용해 보면서, 뉴비 개발자들이 배우고자 노력하는 web2의 기반 기술들이 쉽게 대체 가능한 기교에 불과하게 되어가고 있다 느낍니다.
본래 걱정근심이 많은 저로써는 이러한 레드 시그널에 예민하게 반응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둘째 이유 — 구속당하거나 얽매이지 않음

제가 앞선 수식어를 경계하는 둘째 이유는, 그것이 저를 구속하고 얽매이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그럼으로써 제가 가장 중시하는 가치인 자유가 위험에 빠집니다.

자유란 무엇일까요? 잘 모르겠습니다. 다만 저에게 자유는 마치 DNA처럼, 독립성과 책임질 수 있는 능력의 두 줄기로 엮인 이중 나선처럼 보입니다. 전자인 독립성이란 다른 것에 의지하거나 속박되지 않는 성질입니다. 제가 하고 싶은것, 하려는 일에 대해 다른 사람이나 대상에 얽매이거나 동의를 구하지 않고서도 원하는 대로 결정할 수 있어야 합니다. 후자는 그러한 결정을 책임질 수 있는 능력입니다. 만약 제가 어느날 국방의 의무로 사라진 BTS의 빈자리를 채우는 월드 클래스 아이돌이 되겠다 결정한다고 해보겠습니다. 이때 제 주변의 반응은 정말 i don’t give a shit일지 모르겠네요. 한 마디로 어쩌라고. 제가 자유로운 상태에 있다고 주장하려면, 실제로 제가 선택하는 길을 걸을 수 있도록 준비된 상태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는 충분한 자금일 수도, 명예 혹은 커리어일 수도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저는 자유를 자연스럽게 주어진 벌거벗은 인간의 상태라기보단, 얻기 위해 평생 투쟁해야 하는 대상으로 여깁니다.

여기에 재미있는 포인트가 있습니다. 이 둘이 사실은 묘한 긴장 상태에 놓여있다는 것입니다. “자유로울 수 있는 능력”을 얻고자 만약 우리가 열심히 노력하는 삶을 살면 어떻게 될까요? 그러한 시간들은 그냥 흘러가지 않고 우리들에게 좋은 학벌, 좋은 직업,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지위와, 훌륭한 지인 네트워크와 같은 히스토리로 남아 우리를 빛나게 해줄 것입니다. 사실은 아닙니다. 우리를 빛나게 해주는 것처럼 보이는 히스토리는 동시에 우리를 구속하고 얽매여 자유롭지 못하게 만드는 역설로 이끕니다.

일례로 고학벌 대학생들은 큰 위험에 빠져 있습니다. 그들은 실은 초라하지만 그들에게는 너무나 중요한 3년의 한국 입시 체계에서 성공한 경험이 있기 때문에, 어떻게든 그 업적을 활용하려 하는 편향을 가지게 됩니다. 그래서 그 중 많은 수가 뚜렷한 이유 없이 학점을 열심히 따기위한 노력을 하다 숙고 없이 그대로 대학원에 진학하고 마는 위기에 빠지곤 합니다. 다른 예로 개발자들은 자신이 이미 오랜 기간 고생해서 쌓은 커리어와 경력, 그리고 기술이 있습니다. 그래서 그 밖의 것들에 도전하려 들지 않습니다. 나는 개발자니까 기술자니까 라는 선을 긋고, 그 안에서만 새로운 배움을 추구하기 십상입니다.

나는 언제든 이 학교 자퇴할 수 있어. 원한다면 얼마든 지금 하는 직장을 그만두고 새로운 도전을 시작할 수 있어.

저는 오래전부터 어떤 요소가 저를 정의하려 드는 느낌을 받으면 이렇게 (속으로) 외치곤 했습니다. 이러한 자신감은 제가 가진 반항가 기질에서 비롯되기도 합니다. 하지만 동시에 얽매이는 것을 본능적으로 경계하고 주도권을 가지고자 노력하는 제 모습을 잘 표출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진정 자유로워지기 위해선 자신의 사회적 자본을 늘리기 위해 노력하는 동시에 그것에 얽매이지 않고자 끊임없이 경계해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평균대 위에 서서 어느 한쪽으로 지나치게 기울어지지 않도록 균형을 잡는 체조 선수와 같습니다. 다만 사회 속에 있는 우리는 social pressure의 작용을 받습니다. 이는 우리를 사회 규범에 순종하고 사회적 자본 증식에 집착해 한쪽으로 기울어지게 만드는 인공 중력입니다. 특히 사회적 압력에 취약한 성취지향형 사람들은 얽매임을 경계하는데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 합니다.

한편 작년에는 이런 생각에 기초해 현재 우리가 가진 히스토리와 맥락들Status Quo에 구속되지 않고, 지금 우리가 놓여있는 comfort zone에서 벗어나자는 표어의 Break the Status Quo(B15O) 크루를 결성했습니다. 다행히도 뜻을 함께 해주는 좋은 분들이 곁에 계셨던 덕분에 벌써 마흔 번이 넘는 모임을 가져오며 safety zone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서로를 돕고 있습니다. 저희 크루가 궁금하시다면 한 번 다음 페이지에 방문해 보시겠어요? 크루 모임에 외부 게스트를 초빙하거나, 뜻이 맞는 분들을 많이 모아 깊은 대화를 나누는 파티도 열고 있습니다.

퍼스트 펭귄 크루
이름을 발음하기 어렵다는 피드백을 받아 개명하고 앞선 표어는 만트라로 내렸습니다 :)


사회 속의 자유인이 직면하는 어려움

만약 우리가 얽매이지 않고 자유로울 수 있는 능력을 갖춘다면 진정 행복한 자유인이 될 수 있을까요? 아쉽게도 그렇게 녹록지는 않아 보입니다. 우리는 강렬하게 몰아치는 주변의 비교 압박과 그로 인한 감정적 스트레스에 취약한 사회적 생물이기 때문입니다. 본인의 의지와는 무관하게도, 우리의 감정은 특히 기존에 밟아오지 않았거나 사회적으로 가장 인정받지는 않는 길을 나아가는 사람들에게 끊임없는 도전을 합니다.

감정적인 스트레스 요소는 참 많습니다. 좋은 학교, 좋은 직업,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지위와 직업, 좋은 친구들을 사귀고, 적절한 시점에 결혼을 하고, 가족도 꾸려야 합니다. 이렇게 사회가 요구하는 동시대의 담론은 그 사회 구성원들에게 강력한 구속력을 가집니다. 이미 모두가 인정하는 좋은 진로를 밟아가던 사람은 그 길에서 벗어나기가 더욱 어렵습니다. 박수갈채를 받는 커리어를 쌓다가 갑자기 자신을 인정해주지 않는 새로운 사회, 혹은 새로운 분야, 직업으로 피봇팅하는 사람들은 특히 강력한 사회적 압박에 직면합니다.

실제로 나와 같은 길을 걷던 동료들을 돌이켜 보니 어느 순간 내가 머물던 자리에서 겉보기에 화려한 커리어를 밟고 있을지 모릅니다. 제가 가지 않았던 길뿐만 아니라, 가다 말았던 길에서도 흔들림이 찾아옵니다. 우리 주변의 친구, 지인, 선배, 후배들은 알게 모르게 우리 내면의 목소리에 집중하지 못하게 만드는 수많은 peer pressure를 가합니다. 특히 언론과 미디어, SNS의 수없는 자극에 시달리는 현대인들은 이런 점에서 그들의 조상 그 누구도 경험해보지 못했던 가련한 상황에 놓여 있습니다. 극소수의 성공한 표본만이 우리에게 자주, 자극적으로 노출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끝없이 대상과 나를 비교하며 스트레스성 자극에 고심하곤 합니다.

참 어려운 일입니다. 최근 이와 관련해 책 <행운에 속지 마라fooled by randomness>, <블랙 스완black swan>, <안티프래자일antifragile>로 이어지는 나심 탈레브의 3부작을 읽기 시작했습니다. 선두의 책은 질리도록 들으며 영향을 받아왔고, 안티프래자일은 최근 여러 사람에게 인생 책으로 추천받았기 때문입니다.

이 책에서 저자는 우리가 접하는 훌륭한 성공 표본들이 사실은 운과 무작위성에 의해 좌우된 산물일 뿐임을 인지해야 한다고 역설합니다. 그리고 동시에 인간은 생물학적으로 그러한 종류의 비교로 인한 스트레스에 매우 취약하고, 그래서 올바른 판단을 내리기가 매우 어렵다고도 말합니다. 이에 관해 얼마전 개인 메모장에 적은 글 하나를 공유합니다.


# 계급화와 동경을 경계해야 한다
사람을 계급화하여 윗급을 동경하고 신격화하고, 아랫급을 멸시하고 거리를 두는건 사람의 본능이다.
우월감 혹은 열등감이 강한 사람일수록 계급화의 유혹에 빠지기 쉽다.
이 사상이 강하게 뿌리내리면 급간간의 이동이 일어난다는 사실에 질색하게 될 수 있다. 정확히는 나보다 아랫급의 사람이 나와 동급이거나 우월한 위치에 설 수 있다는 사실 자체에 기겁할 수 있다. 반면 나보다 우월한 사람이 더 우월해지든, 열등한 사람이 여전히 열등하든 그러한 계급 이동은 관심의 대상이 아니다.
하지만 이러한 계급은 사람의 특성이 아니다. 희귀 사건이 발생하면 겉으로 보이는 급을 나타내는 특질들은 한순간에 뒤바뀐다. 이것은 어떤 사람이 주로 운의 작용으로 인해 어떤 특정한 시점에 가지게 된 부, 명성, 고급 음식점과 바에 대한 경험, 세련된 취미 생활, 사회적 인정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운의 작용에 속지 말아야 한다. 겉으로 드러나는 몇가지 요소들은 놀라울 정도로 쉽게 변하고, 생기고, 없어질 수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무작위성이 계속해 만들어가는 부유한 표본을 추출해 그들을 동경하거나 같은 급이 되고자 노력할 이유가 없다. 마찬가지로 가난한 표본을 경험했을때 그들을 끌어내리려 하거나 영원히 그 상태로 놓여있을거라 평가할 이유도 없다.
겉으로 드러나는 급의 특질은 일시적일 뿐만 아니라 부질없기-필연적이지 않기-때문이다.
우리는 계급과 비교가 주는 감정적 스트레스와 고난을 이겨낼 힘을 길러야 한다. 동경심에 속아 어떠한 사람을 자신보다 우월한 위치에 두거나 이를 좇고자 스트레스 받을 필요가 없다.
본질적으로 우리들은 옷만 바꿔입었을 뿐 동일하게 벌거벗은 인간일 뿐이다. 스스로의 목소리에 주의를 기울여서 행복을 찾고자 노력하자. 세상의 소음에 아까운 젊은 시간들을 낭비하지 말자. 끝.

비교, 계급, 우월감, 열등감. 이러한 단어들은 강력한 감정을 환기하는 언어입니다. 그런데 사실 이러한 감정이 발생하는 근거는 대부분 빈약하고 논리적이진 않습니다. 우리는 어떤 우연한 시기에 적절히 흐름을 타서 운의 거대한 작용으로 성공한 표본들을 보며 잘못된 편향에 속고 착각하는 위험에 빠지기 쉽습니다. 이는 우리 스스로를 계급화하게 만듭니다. 그리하여 타인을 동경하거나 신격화하고, 그들과 친해지고 닮고 싶어 하거나 역으로 자신보다 열등해 보이는 사람들에게서 거리를 두게 되는 자연스러운 현상으로 우리를 이끌기 때문에 더욱 위험합니다.

우리는, 특히 자유인을 지향하는 사람들은 이를 경계해야 합니다. 우리가 하려는 어떠한 일이 정말 우리 내면의 목소리에서 나왔거나 혹은 나의 행복을 위해 나온 것인지, 아니면 근거가 빈약한 타인과의 비교 혹은 진화적으로 어쩔 수 없는 스트레스 호르몬으로부터 오는 것인지 명확히 구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정말 어려운 일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평생을 자유롭기 위해 투쟁을 해야 합니다. 이를 위해선 같은 뜻을 공유하는 사람들을 가까이 하고 그렇지 않은 사람들을 멀리하는 것이, 그리고 스트레스를 줄 수밖에 없는 잘못된 표본에서 의도적으로 벗어나는 것이 유리합니다.


저는 자유롭게 살고 싶습니다. 지금의 저는 삶의 많은 것을 구속하는 의무가 어서 해소되길 고대하고 있습니다. 고대하며 제가 그 자유를 온전히 누리고 그것에 책임을 질 수 있는 삶을 살 수 있도록 준비를 해 나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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