퍼스트 펭귄 선언
퍼스트 펭귄 선언 First Penguins Manifesto
22년이 시작될 무렵, 스타트업 씬에서 같은 결을 공유하는 다섯 명의 사람이 모여 퍼스트 펭귄 크루First Penguins Crew를 결성했습니다. 바쁜 삶을 사는 다섯 명의 사람이 매주 한자리에 모이는건 아주 어려운 일입니다. 이에 내부의 여러 질문에 답하고 정체성을 확립하고자 지금의 펭귄 크루 대표 페이지를 만들었습니다.
이후 펭귄 무리는 번성하여 더 많은 사람을 펭귄으로 진화시키는데 성공했고, 23년 하순엔 여러 펭귄 군락이 모인 부족 연합체 형태의 퍼스트 펭귄 연합The First Penguins으로 발전합니다. 현재는 2-30명의 펭귄이 서식하고 있습니다.
이제 펭귄 무리가 새로운 규모 단위에 도달하면서 다시금 정체성에 대한 더 깊은 고민이 필요해졌습니다. 의문을 불식하고 공통의 내러티브를 만들기 위해 통일된 정신적 가치를 명문화해야 합니다.
그래서 지금까지 2년을 향해가는 퍼스트 펭귄의 사람들, 말로 전해진 가치들, 여러 서적과 모티프들을 바탕으로 논산 육군훈련소에서 개인 정비 시간에 다음의 선언문을 작성하게 되었습니다.
퍼스트 펭귄 선언 First Penguins Manifesto
0. (정의) 퍼스트 펭귄은 미지의 위험을 극복하고 무리에서 바다로 제일 먼저 뛰어드는 소수의 선도자이다.
1. (만트라) 우리 펭귄은 우리를 제한하는 세이프티 존을 인식하고 이를 넘어서는 도전을 지향한다. Break the Status Quo.
2. (선택) 우리 펭귄은 우리를 둘러싼 사회적 압력을 때로는 거스르며 고유한 노선을 추구한다.
3. (사고) 우리 펭귄은 당연한 것과 터부시되는 것에의 질문을 장려하고 다른 생각의 가치를 믿는다.
4. (태도) 우리 펭귄은 지적 겸손을 자기 과시 위에, 깊고 오래가는 것을 얕고 프래질한 것 위에 둔다.
5. (사람) 우리 펭귄은 같은 이야기에 대한 믿음을 공유하며, 교집합이 크지만 합집합은 더욱 거대해지는 모임을 지향한다.
5.1. 우리 펭귄은 “사람들을 싫어하지만 바로 그 때문에 그만큼 동료들을 그리워하는 사람들, 곧 홀로 있고 싶은 사람들을 찾는 홀로 있고 싶어하는 사람들”을 환영한다.
6. (한계) 우리 펭귄은 어떤 선언도 불완전하고 그보다 위로 올라가기 위해 딛고 걷을 계단에 불과함을 이해하며, 처음과 마지막 명제를 제외하곤 선언보다 사람을 우선한다.
7. (절대명제) 우리 펭귄은 직관적 미적 관점에서 스스로의 추함을 알게 될 때에 즉시 해산한다.
모티프와 해명
전체적인 구조와 구성은 영국의 위대한 수학자 버트런드 러셀 경과 알프레드 화이트헤드가 공저한 <수학 원리Principia Mathematica>와, 이 책의 구조를 그대로 계승한 카리스마 넘치는 독일 철학자 비트겐슈타인의 <논리철학논고>를 따랐습니다.
논리철학논고는 마지막이자 7번 명제인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하여는 침묵해야 한다"는 문구로 유명한데요. 퍼스트 펭귄 선언의 마지막 7번 명제 역시 별다른 모티프가 없는 고유한 것으로 골랐습니다. 굳이 모티프를 찾는다면 욕망으로부터의 자유로움에 대한 이 글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이 내용은 크루를 클럽으로 확장할 때에 어느 순간부터 이야기해온 내용인데요. 욕망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 고고하게 서있는 자유로운 펭귄이 연상됩니다.
그 외 개별 명제의 모티프는 다음과 같습니다.
0번: 카네기 멜런 대학교의 컴퓨터 공학 교수였던 랜디 포시Randy Pausch가 학기말에 자신의 학생들에게 수여한 First Penguins Award에서 유래한 표현입니다.
During his many classroom discussions, Randy reminded students that even in dangerous waters, one penguin had to be brave enough to take the first dive.
At the end of the semester, he often gave "The First Penguin" award to the student(s) who took the biggest risk.
The design of the Pausch Bridge pays tribute to all the "penguins" of the world with abstract penguin cut-outs.
- Honoring Randy
랜디 포시의 뜻에 대한 헌사로서 퍼스트 펭귄은 카네기 멜론 대학교의 Pausch Bridge를 성지로 하고 있습니다.
1번: Break the Status Quo란 현재 우리에게 놓여진 상태와 환경을 깨부수라는 라틴어 구문입니다. 이 구문은 펭귄 크루의 시작과 함께 해 짧지 않은 기간동안 크루의 이름이었고(원래 Break the Status Quo 크루, 줄여서 B15O 크루였습니다), 현재는 만트라로 남아있습니다.
2번과 3번: 유발 하라리의 <사피엔스>에서 말하는 것처럼, 우리를 둘러싼 "상상의 질서는 우리 욕망의 형태를 결정합니다". 이 사실을 인지하고 때로는 발칙한 상상을 할때에 위대한 발견과 기업이 탄생한다는 것이, Y Combinator의 창업자이자 전 CEO 폴 그레이엄이 <해커와 화가>에서 말하는 핵심 주장 중 하나입니다(3번 명제).
한편 위대한 과학 철학자 토마스 쿤은 <과학혁명의 구조>에서 패러다임 이론을 제창하며 하나의 과학 패러다임 안에 있는 동시대인들은 그 기반 사고방식에서 벗어나기 어렵다고 말합니다. 아마도 그래서, 새 패러다임의 전환을 만들어낸 위대한 과학자들은 기존 체제의 철저한 아웃사이더인 경우가 종종 있었습니다. 그렇기에 기틀부터 다른 고유한 사고를 쌓아올릴 수 있었습니다. 아인슈타인이 그랬고, 괴델도 그러했습니다(2번 명제).
4번: 펭귄은 자기 과시와 비대한 자아를 경계하고, 지적 겸손과 여유를 갖추고자 합니다. 또한 얕은 생각을 벌이기 보다는 깊은 사고를 하고자 노력합니다. SNS와 블로그의 글보다는 오래 살아남은 책의 가치를 믿습니다. 나심 탈레브의 <안티프래질Antifragile>을 믿습니다.
5번: "같은 이야기" 혹은 "공통의 내러티브"와 같은 표현은 유발 하라리의 <사피엔스>에서 나오는 문맥 상의 뜻을 가리킵니다. 사피엔스에서 그는 인류의 차별적이고도 위대한 능력이 "가상의 이야기를 만들고 공통으로 믿을 수 있는 능력"이라 주장합니다.
한편 "교집합이 크지만 합집합은 더욱 거대해지는 사람들"이란 집합론의 이야기는 "화합하되 자기의 소신이나 의로움까지 저버리지는 않는다"는 고사 "화이부동"을 지향하고 "동이불화"를 지양한다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5.1번: 알프레드 폴가Alfred Polgar <중앙 카페의 이론THEORY OF THE CAFÉ CENTRAL> 참조.
20세기 초 빈에선 가난한 지식인들이 카페하우스에 모여 판단의 두려움 없이 서로의 창의적인 생각을 교환했습니다. 알프레드 폴가는 이 카페하우스를 가리켜 "사람들을 싫어하지만 바로 그 때문에 그만큼 동료들을 그리워하는 사람들, 곧 홀로 있고 싶은 사람들을 찾는 홀로 있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모여 있다고 말합니다. 이 표현은 저희가 이야기해온 특성과 너무나 흡사하면서도 우아해 그 표현을 그대로 차용했습니다.
6번: 레베카 골드스타인의 <불완전성>,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의 <논리철학논고>.
산술을 다룰 수 있는 모든 형식 체계의 불완전성에 대한 괴델의 불완전성 정리에 깊은 감명을 받아 앞부분에 이에 대한 헌사를 넣었습니다. 한편 뒷부분은 논리철학논고에서 스스로의 책을 "그보다 위로 올라가기 위해 딛고 걷어버릴 계단에 불과하다"고 표현한 것에서 가져왔습니다. 괴델과 비트겐슈타인의 적대적인 관계를 생각해본다면 이 명제는 다소 아이러니긴 합니다.
끝으로 1, 7번 명제를 제외하곤 선언보다 사람을 우선한다는 것은 과거부터 이야기해온 "우리가 정의한 명문화된 정체성에 과연 특정 사람이 어울리는가 의문이 든다면, 그 구성원이 아니라 정체성을 재정의해야 한다"는 고유한 생각에서 비롯했습니다.
7번: 우리 퍼스트 펭귄들은 욕망을 초월한 자유로움을 바탕으로 추해지지 않고 언제든 해산할 수 있다는 믿음을 통해 아름다움을 지향할 것입니다.
23년 10월 육군훈련소에서 작성한 위의 초안은 다소 간소화가 필요했습니다. 이에 연이은 11월, 펭귄의 집인 엘 초코에서 여러 펭귄 분들과 함께 토론하며 공개 가능한 첫 버전을 다듬어 냈습니다.
내용 자체에는 큰 변화가 없지만 오컴의 면도날을 휘두르면서 표현이 다소 간결해 졌습니다. 덧붙여 류서환 님께서 잠깐 시간을 내어 만들어 주신 선언문 초판 이미지를 아래에 첨부하며 글을 마칩니다.